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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중심의 종교론이지만 미국적이지 않은 기독교다. 궤변 같은 말도 없지 않지만-그것은 내 지식과 한계와 편견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종교의 본질에 대해 적지 않은 깨달음을 준다. 무교도 종교라는 지적은 참 따끔하고 시원하다. 진정한 종교인의 삶을 말하는 부분은 나를 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꼭 봐주었으면 한다. 한계는 분명히 있다. 책의 한계도 있고 나의 한계도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 또 하나의 종교적 행위가 아닐까?

 

*신은 역설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가 증명되는 존재다. 존재의 밖에 있는 존재다. 존재의 바깥이란 시간과 공간의 바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사유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가 극한으로 갔을 때 그 극한을 느끼는 사유가 신의 존재에 대한 단초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무한히 작을 수 있는 크기와 무한히 클 수 있는 크기의 바깥, 시작과 끝의 바깥... 신은 어쩔 수 없는 역설이다. 역설은 말이 안 되는 말, 결국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인간의 사유로는 결론을 낼 수 없는 논쟁이다. 알 수 있음 너머의 알 수 없음이며 알 수 없음 너머의 알고 싶음이다.

 

1. 인간의 성향은 자각하건 못 하건 결국에는 종교적인 법이다.

 

2. 진정한 종교는 자유로울 때만 가능하다. 모든 진리는 오로지 자유로부터만 탄생하기 때문이다.

 

3. 종교는 일단 감정이다. 그것도 우리가 불쾌하게 느끼는 감정, 즉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공포에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것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 역시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고, 정확히 그런 일이 종교에서 일어난다. 두려움은 경외감이 된다. 창조자와 창조에 대한 경외감! 그러니까 종교는 두려움에 좌우되는 인간과 유일신, 혹은 인간과 여러 신들의 영적 관계인 것이다.

 

4. 우리를 둘러싼 무한의 세상, 그리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그 무한의 세상이 없다면 신을 있을 수 없다.

 

5. 인간적이지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삼라만상의 느낌 대신, 인간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그 결과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신학, 즉 종교의 체계에서 전체에 대한 감각이 소멸될 수 있다. 결국 남는 건 내 종교는 옳고 남의 종교는 그르다는 믿음뿐. 그런 믿음은 열정적이고 동시에 편파적이다. 그리고 이런 열정은 광신주의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6. 무슨 일이든 종교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심을 '품고서' 행한다. 따라서 평정한 마음을 유지한다. 이것이 아마도 가장 종교적인 감정일 듯하다.

 

7. 어떤 신이든 그 신의 노예가 되는 것, 초월적인 권력이 무서워 복종하는 것, 곰팡내 나는 도그마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는 것, 그건 종교가 아니다... 부자유와 어리석음과 하나가 되는 순간 종교는 사이비 종교가, 거짓이 되고 만다.

 

8. 종교는 가장 원시적인 가치의 창조자다.

 

9.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인간이며, '지혜롭다'는 말은 자신의 유한성을 안다는 의미다. 종교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한다. 동물에게는 종교가 없다.

 

10. 신을 가능성으로 생각하는 곳에서만 인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두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해서 결코 신이나 신앙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종교가 음악이나 시, 수학, 철학 혹은 다리를 꼬는 간단한 능력처럼 두뇌에서 탄생하였다는 이런 근본적 진리는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1.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만의 중심을 갖는 것, 그건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손꼽는 종교의 주요 동기다. 가장자리에 있으면 혼란, 해체, 죽음이 위협하기 때문이다.

 

12. 대체종교... 사랑, 예술, 정치, 축구, 열정... 분명 인간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믿을 때에만 존재할 수가 있다.

 

13. 엄격한 의식과 장엄한 제의는 강력한 소속감을 불러일으킨다... 종교는 결속을, 결속은 공동체를 창조한다. 그 수단은 의식과 제의만이 아니다.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즉 구속력을 가지는 계명과 금기와 수많은 의무도 중요한 수단이다.

 

14. 초월적 존재가 입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신도들의 헌신을 부채질한다.

 

15. 유한성은 우리의 실존에 꽂힌 고통스러운 가시이며. '신의 모상'인 인간에게 자연이 던진 최대의 모독이다. 죽음은 어떤 형태로건 불명의 욕망을 일깨운다. 그리고 바로 종교의 도움으로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몰아낼 수 있다.

 

16. 진정한 믿음은 마땅히 의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17. 사랑을 하는-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는-사람이 종교인이다. 종교와 아무 관계 없이 살아도 그가 바로 종교인이다.

 

18. 진리는 찾는 자는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신을 찾는 자다. (에디트 슈타인)

 

19. 실존주의자들에게는 인간은 신의 책임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책임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지만 또 한편 인간의 자유이기도 하다.

 

20. 의미는 삶의 유한성이 있어야만 탄생한다.

 

21.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실존주의는 주장한다. 그리고 법칙이란 선과 인간성과 종교가 말하는 사랑을 기초로 한다. 의미는 선을 행할 때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주의는 결국 휴머니즘이며 사회참여의 철학이다.

 

22. 만물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근거는 신이다. 따라서 선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

 

23.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더 나쁘다. 신 자체가 악의 신으로 왜곡될 것이고, 이는 결국 종교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4. 의미를 묻는 질문이 완전히 무의미한 질문이 아닌가?

 

25. 죽음과 더불어 무언가가 끝나는 건 분명하다. 죽음과 더불어 무언가가 시작되는지는 불분명하다.

 

26. 불멸의 과제를 풀기 전에 불멸의 소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유한함 가운데에서 무한함과 하나가 되고 찰나에서 영원이 되는 것, 그것이 종교의 불멸성이다.

 

27. 내가 존재하면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존재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28. 기도의 근본은 (제물과 달리)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이다.

 

29. 기도는 실천으로 옮긴 복종이다.

 

30. 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도는 목적이 없는 순수한 의미다.

 

31. 서구 종교의 모토가 "나는 신을 생각한다. 고로 나는 믿는다."라면, 동양 종교의 모토는 "나는 신 안에 있다. 고로 나는 믿는다."이다... 서양 종교는 초현세적 아버지인 신과 대화를 하지만, 동양 종교에서는 침묵하며 신의 힘과 하나가 된다.

 

32. 올바른 행동이 따르지 않는 기도는 결국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올바른 행동만이 인간을 언제라도 신 앞에 세운다... 행하지 않으면 선은 없다.

 

33. 그리스 신들은 아주 '인간적인' 신들이다. 그리스신화는 인간과 어우러진 제식에서 들려오던 신들의 웃음소리를 기록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제물 관념은 충만과 참여의 관념이었다. 인간을 제물을 바쳐 신의 은총을 바랐을 뿐 아니라 신들과 어울려 흐드러진 파티를 벌였고, 그러면서 적어도 그 순간이나마 스스로를 신격화시켰다.

 

34. 일신론적 종교, 즉 유일신 종교는 처음부터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종교적인 규제의 광기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바로 이것이 현대인들을 따분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35. 빛나는 기쁨의 상징, 웃고 있는 하늘, 하지만 구세주는 환한 태양이 아니라 어두침침한 십자가를 상징으로 택했고, 그 이유 중에는 수많은 이교도의 신들이 앞서 태양을 상징으로 이용했다는 사실도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늘 고통당하는 신이 못 박혀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의미 있는 태양의 상징이 사라지면서 기독교는 원래의 밝고 환하고 즐거운 면모를 상실하였다. 이제 기쁨의 전달은 기독교의 관심사가 아니다.

 

36. 유머가 없는 종교는 편협한 광신으로 타락한다. 물론 종교가 없다면 유머는 냉소가 되고 말 것이다.

 

37. '신앙심'을 '초월성'을 향한, '현세를 넘어서고 싶은' 인간의 근본적인 동경으로 이해한다면 종교란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38. 무는 무신로자의 내세다. 기독교도가 천국을 믿듯 무신론자는 무를 믿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신앙심에서 달아날 수 없다. 무를 믿는 것도 신앙이다.

 

39. 유행과 시장을 뒤쫓기에 급급한 바쁜 세상에서 교회는 신앙을 상품으로 팔아야겠다는 그릇된 생각에 빠졌다. 결국 십자가는 상표가 되고 교회는 백화점이 된다.

 

40. 이성이 없는 신앙은 위험하다.

 

41. 종교의 미래는 인류가 위대한 세계종교의 본질(사랑, 정의, 연민), 나아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본질을 발굴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42. 근본주의는 종교의 사악한 측면이다. 아니, 종교를 인간 경시의 목적으로 악용하는 종교인들의 사악한 면모다.

 

43. 미래의 종교는 신이 인간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바를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44. 인류의 가장 잔혹한 범죄가 무신론적 시스템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나치가 그랬고 러시아의 스탈린주의가 그랬으며 중국의 마오주의가 그랬다.

 

45. 신의 인간화는 종교가 낳을 수 있는 최대의 오해일 것이다... 신의 '인격체'는 풀 수 없는 신의 비밀을 감춘, 인간이 만든 마스크에 불과하다. 종교는 각기 다른 신의 마스크를 에워 싼 사상의 체계다.

 

46. 신은 우주를 그 속에서 진행되는 진화와 '함께' 창조하였다. 그러니까 진화는 창조행위의 일부다.

 

47. 네가 신을 포착했다면 그건 신이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신은 불확정성으로 확정된다. 때문에 모든 신의 교리는 유일하고 거대한 혼란이 된다.

 

48.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오고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다. 이런 견해를 범신론이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신은 자연(우주)과 동일하다.

 

49. 범신론에서는 자연과 신의 대립이 지양된다. 신은 무한한 우주의 모습을 한 자연과 다르지 않다. 자연에 대한 사랑,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 실현된다.

 

50. 신앙심이 깊은 무신론자...

 

51. 기독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예수를 통해 신을 심지어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이 아주 조금 신격화된다.

 

52. 어떤 종교도 완벽한 진리가 아니기에 모든 종교의 가치는 동일하다.

 

53. 빅뱅은-시/공간의 외부에서 '발생'하였기에-신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이다.

 

54. 자연법칙의 필연성과 우연은 이 우주를 형성하였던 기본단위다.

 

55. 생명체를 거느린 지구는 실현된 비개연성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우주의 신성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자연에는 신의 설계도가 있고 그것의 이름이 진화인지도 모른다.

 

56. 전기의 음전하가 양전하보다 더 나은 게 아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더 낫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57. 악의 의미는 인간이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는 데 있다.

 

58. 신의 창조는 선하지도 악하지 않다. 그저 창조가 존재할 뿐이다.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서도 신의 창조는 무죄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건 인간의 사고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의 개념이지 신의 개념은 아닌 것이다.

 

59. 신의 창조는 대립의 기초 위에서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은 죽음을 대가로 하여, 젊음은 늙음을 대가로 하여, 행복은 볼행을 대가로 하여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60.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재해로 인간이 죽는다는 건 별일이 아니다. 신의 입장에서 본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61. 세상이 선하기만 하다면 신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신앙의 중요한 추동력은 더 나은 세계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악을 항상 신이 개입하여 막아준다면 인간은 절대 악과 싸워 선을 쟁취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62.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을 믿을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범죄다... 아우슈비츠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신이 인간을 책임 있는 존재로 창조하였다는 증거다.

 

63. 모든 신의 형상들은 성스러운 존재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신자들을 돕기 위한 보조 수단, 보조 도구일 뿐이다. 완벽한 아버지인 신, 완벽한 어머니인 신, 완벽한 친구인 신, 완벽한 자연인 신 등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친숙한 형상들을 만드는 것이다.

 

64. 진짜 신앙의 특징은 신의 권력의 '물질적' 증거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소위 기적이란 것들, 즉 자연법칙과 경험에 위배되는 사건들에 대한 건강한 의구심-이다.

 

65. 미신은 어떤 의문도 용납하지 않으며 의심을 증오한다. 진정한 신앙은 다름 아닌 의심과 그 의심의 극복을 요구한다. 미신은 굳어 있기에 정신의 자유를 두려원한다.

 

66. 처음부터 미신은 진정한 신앙의 일부인지 모른다.

 

67. 신은 예수 안에서 우리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우리 자신을 신격화시킨다. 이것이 기독교의 약속이다.

 

68. 살다 보면 옳은 것보다 강한 것이 득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독교도의 신앙 고백이 예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기독교 초기에 그 문제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69. 한마디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현실에 편입시키기 위해 신격화하였고 그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다.

 

70. 신에게로 가는 힘겨운 길은 결국 누구나 저만의 방식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며, 그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71. 우리가 원한다면 신은 모든 인간에게 유일한 방식으로 말을 할 것이다. 과학의 진리는 이와 다르다. 과학의 진리는 만인에게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

 

72. 세상이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인류에게서 사라진다면 모든 것은 끝이다. (게르숌 숄렘)

 

73. 종교인들에게는 태초에 신이 있고 과학자들에게는 마지막에 신의 성찰이 있다... 자연과학과 종교는 결국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 인식과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

 

74. 무지한 신앙은 허약한 신앙이다.

 

75. 물질은 신에게 관심이 없다.

 

76. 부자가 재산에 사로잡혀 있듯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처지에 사로잡혀 있다. 가난도 그 자체로는 종교적 가치가 아니라 저주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만이 종교적 가치가 있다.

 

77. 자기 자신을, 신을 찾고자 하는 자는 필요 없는 짐을 버려야 한다.

 

78. 안경공이나 시계공 출신의 철학자는 있어도 은행가나 대상인이 철학자가 된 사례는 없다.

 

79. 종교는 정신을 물질과 반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는 다른 하나를 통해서만 이해된다. 절대적 정신인 신조차 인간에게는 오로지 창조를 통해서, 다시 말해 우주의 물질적 현실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80. 과거에는 사제나 학자들만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신의 말씀이 라틴어나 그리스어, 히브리어로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81. 사제는 복잡한 성사가 있는 곳에서만 필요한 존재다.

 

82. 예수는 기독교 최초의 사제로 해석되며, 모든 사제는 예수의 뒤를 잇는다. 예수 안에서 신과 사제와 제물이 하나가 된다.

 

83. 이슬람교는 아예 사제가 없다... 유대교 역시 지난 2000년 동안 사제를 두지 않았다... 기독교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만인사제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제는 스승과 같다. 좋은 사제와 좋은 스승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지만, 나쁜 스승이 교육의 길을 가로막듯 나쁜 사제는 신으로 가는 길을 가록막을 수 있는 것이다.

 

84. 인간인 반목하는 것이지 종교가 반목하는 것은 아니다... 반목하는 종교는 신을 이용할 뿐이다. 다들 마치 신이 자기 종교의 신자인 양 행동한다. 신은 종교의 '대상'이지 종교의 일원이 아니다... 신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이슬람인도 아니다.

 

85. 참여는 기독교 최고의 의미이며 예수의 모방이다... 아우슈비츠와 유대인 학살... 연민은, 측은지심은 기독교의 정신적 기반이다. 또한 기독교의 최고 의무다. 연민과 참여, 이 둘로부터 극도로 정치적이고 활동적인 기독교가 탄생한다.

 

86. 신앙은 광기의 독을, 이성은 무의미의 독을 피할 수 있다.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은 이성을 잃은 자들이다.

 

87. 사랑으로 일구어낸 사회질서는 교회의 정치적 '임무'이며 인류의 유토피아다.

 

88. 신을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종교는 애당초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여성은 남성 신을 자극하는 요물이기에 억압하고 물리쳐야 할 존재다. 따라서 여성의 억압은 곧 신의 여성적측면에 대한 억압으로 해석할 수 있다.

 

89. 토템 의식은 종교의 전신이며, 토템 성찬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전신이다...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삼고 목축을 하게 되면서 토템 의식은 힘을 잃었다.

 

90. 동물에 대한 경멸은 언어에까지 침투되어 있다. '인간적인 것'은 선한 것과 동의어이고, '동물적인 것'은 나쁜 것과 같은 뜻이다. '동물적' '야만적' '짐승 같은' 따위의 수식어가 붙는 인간은 대량 살상처럼 인간을 완전히 경멸하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91. 티베트 사람들의 동물 존중은 창조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92. 성경의 진리-복음서의 진리-는 날마다 새롭게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달달 외우기만 하고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심오한 의미를 파괴하는 행위다.

 

93. 신앙은 자신을 넘어 성장하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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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anghodu
대한민국 보수의 참을수 없는 가벼움
  
  정권이 진보에서 보수으로 바뀌었다고 하도 그래서 나라가 보수적으로 바뀔 줄 알았는데(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불행히도 보수세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가볍고 경솔한 권위주의 세력만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것 같다.
  
  정권이 이념정부에서 실용정부로 바뀌었다고 하도 그래서, 나라가 실용적으로 바뀔 줄 알았는데(이것도 역시 말이 그렇다는 것임), 불행히도 역사교과서를 비롯해 경제정책에 이르기 까지 '가상의 좌파'에 대한 공격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새로운 이념정부가 들어선 것 같다.
  
  무릇 보수라 하면 보수적 가치를 지니고 실천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아니면 세계 공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보수적 가치를 들라면 과도함을 제어하는 '절제',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신중함', 매사에 성심 성의껏 임하는 '진지함', 그리고 남을 속이지 않는 '정직'과 '근면' '성실' 등이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지금과 같은 금융위기, 경제위기, 그리고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을 가장 중요한 덕목들이다.
  
  그런데 소위 보수정권하에서, 아니 보수가 주류가 된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를 지닌 보수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라 전체가 가볍고 경솔하고 즉흥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의 헛발질에서 시작해, 쇠고기 협상, 대일외교, 장관 인선, 언론정책, 그리고 최근에는 금융위기에 대한 대처와 발언을 보면서 현 정부의 가벼움과 경솔함, 무책임성과 즉흥성 등에 매일같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어제 얘기가 오늘 달라지고, 오늘 얘기가 내일 또 달라진다. 사과했다가 잡아가고, 괜찮다고 했다가 위기라고 하고, 위기라고 했다가 선제대응을 잘 했다고 한다. 국정감사장은 감사를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마치 국정 연예인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이 가볍다.(연예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 보수세력의 왜곡과 억지가 난무하는 국정감사장 ⓒ뉴시스

  한편 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진단이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이랬다저랬다 급변하는 소위 보수언론의 가벼움도 정말 기가 막힐 정도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대통령이 전봇대 하나 뽑으라고 했다고 그렇게 칭송하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심하게 물어뜯고 있다.
  
  국내 언론들도 작년 대선 무렵 영어와 일본어로 된 해외의 자료를 읽을 수 있었다면 성장위주의 신자유주의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고 미국식 금융시스템이 위험하다는 흐름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언론들은 당시에는 시대정신이라는 어마어마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성장을 강조하다가 1년도 안 돼서 이제는 성장위주의 정책을 멈추어야 한다는 사설까지 내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의 최대의 골칫덩어리가 된 '747 정책'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언론의 바람몰이에 편승한 정책이 아니었나? 이제는 언론이 앞으로 있을 책임 공방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매우 강한 의구심마저 일고 있다.
  
  진정한 보수는 간데없고 가벼운 권위주의 세력만 판을 치고 있으니, 자칭 보수세력이라는 이 집단에서 가볍고 경솔하게 만들어 낸 사회적 왜곡은 무수히 많다. 그것은 보수언론을 통해 확대·재생산 되었는데, 상당 부분 현 대한민국의 위기와 혼란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왜곡을 바로 잡지 않고는 한국이라는 배가 풍랑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항로로 들어서기 어려울 것 같다.
  
  구별도 못하고
  
  '신중, 정직, 진지'를 근본으로 해야 하는 보수가 너무나도 가볍게 왜곡시키는 것은 우선 엉터리 구분법이다. 최근 나타난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든다면 바로 좌파와 우파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현재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앞날을 진단하고 처방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인데, 집권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은 이걸 전혀 못하고 있다.
  
  집권 보수세력은 신자유주의 정권인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계속 좌파로 몰면서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성장을 멈추게 했고, 경제를 망가뜨렸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신자유주의 정권을 좌파라고 구별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집권 보수세력은 신자유주의 세력을 좌파라고 바득바득 우기면서 자신들은 거의 무정부주의적인 요소와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혼합된 최극단의 우파 정책을 추진했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그러한 방향에 대하여 징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러한 엉터리 구별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으로만 가는 집권세력은 나라를 구하지 못한다.
  
  보수세력은 이 외에도 대북정책과 대미정책에 있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구별하지 못하고, 선진화와 근대화를 구별하지 못하며, 반미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을 구별하지 못한다.
  
  비교도 못하고
  
  국민의 생각을 좌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왜곡은 엉터리 비교이다. 사회과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비교가 어려운 이유는 자칫 잘못하면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기에 가깝다. 그런데 보수세력들은 한국과 싱가포르, 한국과 두바이, 한국과 중국의 경제를 비교하며 국민들을 현혹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이 어떻고, 두바이의 개방도가 어떻고, 중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한국은 한참 뒤 떨어져 있다는 비교가 정치권과 언론, 경제계에서 한참 많이 나왔다. 그런데 싱가포르, 두바이, 중국은 한국 경제와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경제 구조와 경제 발전의 수준, 전혀 다른 국가의 크기와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다. 그런 제도와 역사와 발전 단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않고 무작정 비교하면 그냥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다.
  
  우리에게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한미 FTA의 반대와 찬성을 쇄국과 개국으로 비교한다든지 대북 햇볕정책과 영국 채임벌린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비교하는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이게 왜 엉터리인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여하튼 절제를 덕목으로 하고 신중한 보수라면 정확한 비교를 해야지 비교와 비유를 혼동해 국민을 혼미하게 만들면 안 된다.
  
  인과관계도 모르고
  
  무엇이 무엇의 원인이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문제의 근원을 알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인과관계(causal relations)와 상관관계(correlations)를 구별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둘 간에 서로 상관성은 있지만 어느 쪽이 어느 쪽의 원인과 결과가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 내는 것은 사실 무척 어렵다. 그런데 한국의 집권 보수세력은 너무나도 가볍게 인과관계에 대한 결론을 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촛불시위에 대한 것이다.
  
  촛불시위에 대한 원인이 좌파의 준동 때문인지, 정부의 실책 때문인지, 반미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PD수첩> 때문인지 그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연구가 필요한 문제다. 그것이 정확히 밝혀지고 나서 법을 적용해야만 진정한 법치인데, 그냥 정치적으로 바람몰이식의 인과관계를 만들어서 구속하고 수사하고, 전 국민을 반미주의자로 만들어 버리는 대단히 신중치 못한 언행을 집권 보수세력은 하고 있다.
  
  멜라민 사태에는 왜 촛불시위가 없느냐는 비난은 이러한 잘못된 인과관계 분석에 의거해 상당수의 국민을 반미세력으로 규정해 버리는 결과를 만든다. 대한민국을 반미국가라고 엉터리로 규정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과관계의 분석은 너무나도 어렵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하는 것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원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원인이 주된 원인인지를 밝히는 것도 어렵다. 연예인의 자살과 관련해 오직 악플이라는 단순한 요인만을 지목해 인터넷 공간을 규제하려고 한 것도 보수세력의 가벼움을 보여준다.(그렇다고 악플이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양극화의 원인, 북한의 핵무장과 비핵화 프로세스에 관한 원인, 한국만의 독특한 환율급등과 관련한 원인 등 현재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에 대한 원인분석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인과관계 분석을 가볍게 정치적으로 단언해 버리면 국가의 미래가 어디로 갈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 장면 ⓒ뉴시스

  대한민국에 필요한 두 세력
  
  사회가 위기에 봉착하고 혼란해질 때 세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택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을 잊어버리고 아무생각 없이 사는 것이다. 이게 선택된다면 집권세력은 다양한 왜곡을 통해 국민을 그러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자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쾌락에 몰두하거나 자포자기해 그냥 흘러가거나 극단적인 경우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은 지루하고, 재미없고, 힘들지만 보수적인 가치로 사회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다. 절제와 신중, 진지함과 정직, 근면과 성실을 가지고 사회의 기초를 다지고 오래 버틸 수 있는 사회적 체력을 배양해 주는 것이다.
  
  세 번째의 방향은 새로운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그 원인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만들어 내 강하게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뉴딜정책이 대표적인 예이다.
  
  첫 번째 방향은 나라가 망하는 길이다. 두 번째의 방향은 진정한 보수세력이라면 택해야 할 방향이다. 세 번째의 방향은 진정한 진보·개혁세력이 택해야 할 방향이다. 어려움의 정도로 구별하자면 아마도 세 번째가 가장 어렵고 첫 번째가 가장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두 번째의 방향으로 가는 세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에는 첫 번째의 방향만 보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큰 흐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잊어버리고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두 번째든 세 번째든 실력과 콘텐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수는 침묵과 신중 속에서 안전한 길만 택할 것이고, 진보·개혁세력은 첫 번째의 방향과 유사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판단이 섰을 때 과감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고, 진보는 과감하게 부수고 나가기 전에 정확한 판단과 그림을 먼저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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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anghodu
품격 있는 '주류 리더십'을 보고 싶다
  [고성국의 정치분석]'박근혜 대세론'에 '이재오 복귀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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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금융위기 와중에서 위기의 발원지이자 위기해결의 1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의 정치권이 보여준 모습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무책임하게까지 보였다. 7000억 구제 금융법안을 1차 부결시킨 미 하원의 움직임이 그랬고, 그로 인해 세계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중에도 지역구 유권자들의 목소리만 중요한 것처럼 움직인 미국 정치인들의 행태가 그러했다.
  
  "왜 우리의 피·눈물 같은 세금을 저토록 탐욕스럽고 무능한 월가의 투기꾼들을 위해 써야 하는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야당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의장에게 무릎을 꿇고 구제금융법안 통과를 읍소했다는 보도에 접한 사람들은 다들 미국 의회가 이처럼 대단한 곳이었는지 새삼 놀랐을 것이다.
  
  1차 구제금융법안의 하원 부결사태로 인해 세계경제위기는 조금 더 심화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이번 위기의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는지가 훨씬 분명해졌다는 점에서 1차 법안 부결 사태의 긍정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모름지기 정치인은 어떤 경우에도 국민 제일주의, 민심 제일주의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당론과 소신 사이, 당론과 지역구 민심사이, 당론과 국민여론 사이에서 고민해보지 않은 정치인이 있을까? 다원화되고 다층화된, 그래서 지역, 계층, 세대, 성, 이념지향 등의 요소들에 의해 복잡다기하게 균열돼 있는 국민을 100% 만족시킬 정책과 방침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당론이나 대통령의 뜻 또는 정부방침과 다른 소신과 민심과 여론 때문에 고민하고 번뇌하는 것은 정치인의 숙명이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당론을 배척하고 사사건건 대통령의 뜻에 반하여 정부와 물어뜯고 싸우는 것이 소신정치는 아닐 것이다. 당론과 소신사이에서 대통령의 뜻과 민심사이에서 정부방침과 여론 사이에서 고뇌하면서,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적 근원을 다시 돌아보고, 때로는 인내하고 때로는 행동하며, 당론과 소신 사이의 간극을 메워 나가고 대통령의 뜻과 민심 사이의 괴리를 채워내고 정부방침과 여론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 나감으로써 리더십을 키워가는 것이 아닐까.
  
  민심과 여론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당론과 대통령의 뜻과 정부의 방침을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아우르고 때로는 조정해가는 일의 어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 중도와 중용과 조화를 찾아가는 품격 있는 주류 리더십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다.
  
  대통령의 임기가 4년여나 남아있음에도 '박근혜 대세론'이 얘기되고, 이재오 전 의원의 복귀가 유일 대안인 것처럼 얘기되는 리더십 부재의 집권당에게 품격 있는 주류 리더십을 주문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 싶으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걸음의 전진인들 있겠는가 싶은 마음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김창룡 교수의 논평 'YTN을 바로 세워라' 중 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문제제기의 구체성을 보완하고 싶다.
  
  "일부 논평가들의 '말뿐'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이렇게 말하기도 얼마나 어려운가. 무엇이 잘못됐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모두 알지만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행동 없고 말만 한다고 나무란다면 앞으로 이런 말조차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용기 있는 목소리에 박수를 보내는데 인색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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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anghodu